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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아스리엘은 치밀어오르는 죄책감을 애써 눌러 삼켰다. 모든 것은 차라를 위해, 그 아이에게 약속했으니까. 아스리엘은 몸 속에서 제 멋대로 날뛰는 강한 의지를 자신의 힘에 실었다. 제 손에서 흘러나간 마력이 결계 사이를 뚫고 나아갔다. 아스리엘은 결계의 틈으로 걸어갔다. 아직 남아있는 결계의 잔재들이 몸을 저릿하게 눌러왔다. 하지만, 아스리엘 안에서 숨 쉬던 의지가 눈을 뜨며 주위의 마력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력은 제 힘을 잃은 채, 소멸하였다. 
 아스리엘은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가면 차라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그는 소년을 안았던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내 목소리 들려, 차라?

 들리지 않을 목소리이지만, 닿길 바랬다. 적어도 제 몸 안에 존재하는 그의 영혼에게라도 닿기를 바랬다.

 *있잖아, 차라. 난...단 한 번도 너를 가족으로 생각 해 본 적 없어.
 *널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아스리엘은 차라를 보며 살풋 웃었다. 차라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 '우리는 가족이잖아'. 그는 그 말이 정말 싫었다. 싫어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는 한 번도 소년을 이겨본 적이 없다. 행여라도 소년이 미워할까봐, 갑자기 왔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릴까봐 두려워서 그는 항상 소년에게 이기려 하지 않았다. 

 *너는 네 빨간 눈이 싫다고 했지만, 난 네 눈이 정말 좋았어. 어둠속에서 빛나는 루비같았거든.
 *장난이 조금 많이 심했지만, 장난기 넘치는 네가 좋았어. 
 *이런 말을 네가 살아있을 때 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소년의 온기가 행여라도 사라질까봐 그는 소년의 가녀린 몸에 제 몸의 온기를 나누었다. 소년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면 정말로 떠난 것 같아서, 아스리엘은 울렁이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물기어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래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니까. 너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차라를 만난 후 부터 쭉 품어온 감정이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품어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젠, 지금이 아니면 전하지 못할 마음이다. 지상으로 가기 전에, 이 곳, 지하에서 말하고 싶었다. 결계의 끝이 보이고 아스리엘의 여정이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아스리엘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 차라.

 마음 속에서 내뱉은 이 한 마디가 무거워서 차마 말하지 못 했었다. 그래도, 지금이나마 전했기에 아스리엘의 감정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는 결계와 지상의 경계선에 서있다. 그는 소년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맞춘 뒤, 발걸음을 옮겼다.
 결계의 끝에서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아, 저게 별이구나. 천장에서 빛나는 보석이 아닌, 제 빛을 뽐내는 별이구나. 아스리엘은 아직 제 몸 속에 남아있는 온기를 마음 속으로 품고 있다. 아마 아직 사라지지 않은 소년의 영혼 조각들이겠지. 아스리엘은 자신의 심장 주변으로 손을 얹었다. 살갗 너머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도착했어, 차라. 아스리엘은 소년을 향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함께 왔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스리엘은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차라, 네가 보고 싶어. 한 번만 더 네 목소리를 들려줘. 그는 어느 새 차가워진 소년의 몸을 끌어 안고서 흐느꼈다.

 *유감이네, 아스리엘.

 그 순간, 머리 속에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평소처럼 장난기어린 목소리가 아닌,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한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도 널 가족으로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아스리엘은 점점 숨이 막혀왔다. 누군가가 몸을 짖누르는 듯, 움직이기는 커녕, 신음조차 뱉을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비웃는 듯, 차라의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차올랐다.

 *푸흐흐, 너 같은 괴물 따위가 어떻게 내 가족이 되겠어? 아하하핫, 웃기는 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누가 보면 코미디언인줄 알겠어.

 지끈거리는 머리가 조금 진정되었을 즈음, 아스리엘은 제 멋대로 움직이는 오른팔을 느꼈다. 아아,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어. 치밀어오르는 토기를 참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소년의 몸을 보았다. 이미 텅 비어버린 껍데기일 뿐인 몸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차라는 절망에 빠져있는 아스리엘을 조롱하듯이 서서히 자신의 의지로 그의 몸을 움직여갔다.

 *좋아한다고? 하, 그딴건 진작에 알고 있었어. 네 순수하다 못해 멍청한 두 눈을 보면 알 수 있었거든.
 *아아, 날 사랑하는 구나. 역겨울 정도로 말이야.

 차라는 아스리엘의 목소리를 빌려 말했다. 사랑한다, 사랑해. 하하, 정말 웃기는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 그의 마음이 아려왔다. 소년의 눈빛에 눈이 멀어 그 안에 있는 광기를 미처 보지 못 했다. 어리석은 자신을 책망할 뿐이었다. 그의 몸을 오롯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차라는 그의 뺨을 손톱으로 그었다. 얇은 선혈이 흘러내리자 차라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목소리로 나즈막히 말했다.

 *사랑? 하, 그딴거 안 믿어. 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은지 오래니까.
 *그래도 고마워, 아스리엘. 너의 그 사랑덕분에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었으니까. 정말로 멍청한 아스리엘, 너무 고마워서 키스해주고 싶을 정도야. 아하하핫.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조롱할 셈인가. 아스리엘은 흐릿해져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차라에게 소리쳤다. 허나, 이미 살인귀에 먹혀버린 소년에게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차라는 아스리엘의 눈을 빌려 어느 새 깨끗하게 매꿔진 결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대해도 좋을거야, 아스리엘. 이 빌어먹을 지상을 멸망시키고 나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넘치고 넘치는 지하를 부수러 갈테니까.

 아스리엘의 마음이 요동쳤다. 아아, 그건만은 안 돼. 괴로워하는 건 나 하나면 되니까, 지하의 모두들을 괴롭히지 마, 차라. 차라의 의지를 담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소년은 피식, 웃으며 눈물자욱을 옷자락으로 닦았다. 

 *발버둥쳐도 소용없어. 너는 그저 내 안에서 네 두 눈으로 사랑하는 세계가 망해가는걸 바라보고 있으면 돼.

 차라리 나를 죽여, 차라. 날 죽여. 그는 자신을 죽이라며 계속해서 외쳤다. 부탁이야, 제발. 이러지 마, 차라.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쳤다. 자신의 영혼이 짖이겨지는 절망이 아스리엘을 덮쳤다. 그의 절규소리를 듣고 있는지, 무시하는지, 차라는 그 어느 때보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로 답했다.

 *늘 그렇듯 찌질이처럼 울고 있으라고, 아스리엘.


 이제 달래줄 사람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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